좋은 글. 시

한국의 아버지

들녁나그네 2009. 5. 19. 16:23

유행어에 나타난 아버지의 유형은 세 가지다.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

-그리고 독수리 아빠다.

 기러기 아빠에 펭귄 아빠가 추가된 것은 그보다 더 슬프고 외로운 아버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러기 아빠는 그래도 이따금 날아가 아내와 아이를 보고 온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아빠는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썰렁한 빙산 같은 집에서 혼자 갇혀 사는 펭귄새가 된 것이다. 말만 새지 날 수 없는 펭귄처럼 말만 아빠지 아빠 노릇 못 하는 아버지의 출현이다.

그러나 독수리 아빠는 펭귄은 물론이고 기러기 아빠보다도 행복하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어 아무 때나 날아가 떨어져 사는 가족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아내와 자식이 없기에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자기는 어떤 새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안심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아버지 없는 가족’ ‘아버지 부재의 사회’가 되어 간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런 농담도 생겨나고 있다. 유학 간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받기가 무섭게 “아, 너냐. 엄마 바꿔줄게.” 늘 그랬듯이 교환수 노릇을 하려고 한다. “아니에요. 아버지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왜? 할 말이 뭔데. 니 돈 떨어졌나.” 그러자 아들은 또 “아니에요. 돈이 아니라요, 절 보내시고 외롭게 사시는 것 같아서 아버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그 말을 듣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니 술 먹었나.”

이것이 기러기·펭귄·독수리 아빠보다도 더 심각한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 모습이다. 한국인 이야기가 뭐 별거냐. 아무리 심각하게 써봤자 이런 농담만큼도 제대로 우리의 얼굴을 그려내기 힘들다.

그래, 그러면 옛날 아버지는 어땠는가. 한마디로 새는 새지만 그냥 새가 아니라 수탉이다. 암컷이 수컷 발등에 알을 낳으면 털로 품어 부화시키는 진짜 펭귄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새는 모성의 메타포다. 알을 품고 병아리를 달고 다니는 것은 오로지 암탉의 일이기에 수탉은 원래부터 펭귄이니, 기러기니, 독수리니 견줄 필요가 없다.

암탉은 알을 낳지만

 귀신과 도깨비가 판치는 어둠을 내몰고 광명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수탉의 몫이다. 그래서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닭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예찬한다. “머리에 관을 쓴 것은 문(文)이요, 발에 갈퀴(距)를 가진 것은 무(武)요, 적에 맞서서 감투하는 것은 용(勇)이요, 먹을 것을 보고 서로 부르는 것은 인(仁)이요, 밤을 지켜 때를 잃지 않고 알리는 것은 신(信)이다.” 이러한 오덕(五德)은 주로 수탉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닭의 이미지를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천년 사는 단정학(丹頂鶴)이 될 것이고, 더 올라가 오동나무에 오르면 봉황(鳳凰)이 될 수도 있다. 신라 때까지 올라가 신성한 숲을 만나면 계룡(鷄龍)까지 나타난다.

암흑기라고 부르는 일제 36년 그때의 아버지들은 비록 날개가 퇴화하고 깃이 뽑혀 나가 가축처럼 길들여졌어도 각혈처럼 어둠 속에도 빛을 토할 줄 알았다...............................................................................

                                   5월19일 중앙일보 이어령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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