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있어『좌·우』 호칭의 기원, 유래
전 국토를 빼앗긴 조선 민족이 을사국치 10년이 지나도 굴하지 않고 3.1 봉기로 궐기하자 당황한 일제는 근로 민중의 결사항전을 꺾을 방도로 조선인 지주·자본가·지식인들을(초기엔 상업으로 지주가 된 중인계층) 친일 앞잡이로 끌어들여 신문을 만들게 했다. 이는 자주적 근로세력의 지하운동을 지상으로 끌어내어 제 민족과 제 민중을 억압, 독립의지를 말살케 할 목적으로 이이제이의 술책을 쓴 것이다.
오늘날 신문과 방송으로 대표되고 있는 언론의 위력에 대해서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막강하다. 언론학자가 아닌 일반 비전문인들까지도 그 거대한(막대한 광고료 수입으로 재벌이 되어) 영향력에 관해서는 매일 보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누구나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의 경우, 라디오는 거의 영향력을 보이지 않았고 신문 자체의 영향력도 오늘날처럼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로써는 한반도의 민족성원 대부분이 문맹자이거나 신문구독을 할 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았고, 또 필요성도 없었던 것 같다. 신문의 내용 또한 하나같이 민족ㆍ민중의 권익이나 지향과는 반대되는, 일제의 지시에 따른 것들 뿐이었다.
한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일제 치하의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독립투사 김구 선생의 행적은 그 후배 투사들이 거사할 때마다 기사로 나오는데, 그때마다 기성 언론에서 일제 경찰의 정보자료 배포대로 언제나 '테러분자' '반역도배' 등으로 표현되었고, 동북만주 일대에서의 독립군 활동은 거의 비밀에 부쳐지거나 어쩌다 경찰서 습격사건이라도 날 경우는 '비적', '공산비적', '공산노적', '赤隊(적대)', 혹은 '공산赤徒' 등으로 몰아붙이며 '용맹한 황군', '관동군'의 토벌에 의해 궤멸 격퇴되었다는 기사 등이 실렸을 뿐이다.
이것은 조선 민중들에게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싸우고 있구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담은 소식으로, 캄캄한 밤중의 불빛처럼 민족동포의 가슴을 희망으로 뛰게 하는 효과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제와 그들의 앞잡이는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아둔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주수인의 아큐처럼 독립군은 붉은 도적으로 묘사하여 그릇되게 하였다. 당시의 신문은 일제의 관제 신문이든 기성 언론이든 철저히 일본제국에 충성하기 위해 반민족적 역기능을 일삼았던 식민지통치의 선전도구였으며 온 민족의 뇌리에 종속사회인으로서의 의식을 여러 누대에 걸쳐 전해지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계는 선ㆍ후진국을 불문하고 절대군주·귀족·자산계층에 의한 전제·독재권력이 존재하는 한편 노동자·농민·장인들에 의한 수평파·사회당·공산당도 생겨나 지배세력과 경쟁·충돌을 거듭해왔다.
역사상에서 보면, 수탈 가능한 위치에 있으면서 '자유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한 힘든 노동은 피하고 수입은 늘리는 것을 좋아하는 세력을 '우파'라 하고, 우파들의 통제 때문에 고통스러운 생산노동을 하고도 제 몫을 받지 못하는 측에서 이 같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회 환경을 바꾸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파는 대체로 수탈자 측의 행위를 긍정 또는 지지하는 실체들이었고 좌파는 대체로 피수탈자 측이 겪어온 억울한 고통의 현실과 역사를 끝내자는 세력이었다.
약자의 편을 들어야 하는 좌파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굳은 의지가 필요했다.
한반도 사회의 지난 100여 년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확연히 진실로 드러난다. 식민지 쟁탈시기의 제국주의 국가들(스페인·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일본)은 식민지로 탈취한 약소국 근로 대중에 대해서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극악한 우파였으며, 또 각각의 국가 사회 안에서는 정치 경제 지배세력이 우파였고 생산대중과 지지세력은 대개는 좌파로 몰렸다. 그리하여 피수탈의 고통을 참다못해 단결하여 평등사회에로의 개혁을 부르짖거나 봉기하면 반격을 받아 처참하게 응징되는 쪽은 언제나 좌파였다.
좌익·우익의 호칭이 생긴 것도 프랑스 혁명에서 절대군주와 귀족·승려들을 이긴 신흥 자산계층과 노동자·농민. 청년 학생들에 의해 민의의 대변자로 뽑힌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 자리를 잡은 것이 급진 개혁파냐 온건파냐에 따라 좌·우측 좌석에 무리를 지어 앉은 데서부터였다.
한반도에서의 좌·우파 실체들과 호칭은 일제 식민통치시기에 만들어졌고 그것이 미군의 점령과 더불어 매국 역적으로 몰리게 될 친일파세력이 민중의 지탄으로부터 살아나기 위한 구명도생의 방편으로 좌·우익의 호칭을 즐겨 쓰기 시작했다.
친일파세력은 매국배족의 범죄사실을 감출 수 있는 방법으로 좌·우 동등·대칭의 방향만 다른 이념의 소지자로 위장했다. 친일 범죄자로 몰리게 된 사람들은 일제나 미 점령군의 지배자들이 싫어하는 러시아 혁명구호나 마르크스 사상과 유사한 '평등 민주화' 요구가 나올 때마다, 특히 6·25전쟁부터는 모든 근로서민대중과 지식인들을 '빨갱이''붉은 악마'로 몰아치면서 '러시아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로 증오케 하였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대등한 개념의 '우익'이라는 호칭을 방패 삼아 착취와 매국배족의 범죄자 얼굴을 가리고 평등ㆍ민주를 바라며 저항하는 민족주의 근로 대중에겐 '좌익'의 옷을 입혀 '붉은 악마'로 윽박지르고 잔인하게 학살했다.
친일매국노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한 협박조의 비아냥과 저주의 '좌익' 호칭은 국민들의 깨우침이 없는 한, 특정 종교의 이기배타적 '사탄타령' '악마타령'과 함께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아직도 친일파라는 반역 자산세력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는 이 사회에서 '좌익'이라는 호칭 속에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약점을 악용, 경제평등과 동등한 인권을 부정·묵살하고 우월적 지배세력임을 은근히 뽐내면서 자기네가 지금까지 누려온 직간접의 노동력 착취(체제)와 인간차별을 사회 의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영구히 확보하려는 비열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 90년~92년 어느 해의 계간지『순국』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