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녀산 - 김지하
무성하는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웨쳐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 오르는 맨드라미
터질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 이야기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타는 여름 머나 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바랜 사진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지막 우럴은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고
터질듯한 노여움이 되살아오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웨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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