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길을 묻다 .. 정 양 모 신부
생명과 평화 길을 묻다’ 정양모 신부가
“예수는 재림하는가”
“개신교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라고 믿는다. 또 지금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음은 청중들과 정 신부가 나눈 질의응답을 요약 정리한 글.
- 지금은 성탄절 4주전으로 다시 예수님 오시길 기다리는 천주교의 대림절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린지 2000년이나 흘렀다. 대림절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 “메시야가 오길 기다리는 예수재림신앙은 교부 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20여년만에 쓰인 데살로니가서에도 종말임박설이 드러나있다. 또한 이것은 사도들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먼저 한 시대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전했다. 성경에 깊이 담겨져 있는 종말임박설은 마태복음 10장과 마가복음 9장 등 성경의 세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것이라던 사도들은 죽어 백골이 진토된지 오래고, 온다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나라는 오지않고, 교회가 툭 튀어나왔다. 적자는 태어나지 않고 서자가 태어났다’고 말해 1910년 가톨릭에서 제명당했던 신부도 있었다.
사도들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신약이 쓰이기 전후로 이스라엘에서 성행하던 묵시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정보가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 밖에 없고, 상상이 지나쳐 공상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듯 성경 속에는 진실이 있는가 하면 당시의 문화도 있다. 성경을 볼 때 이것을 간과하면 1998년 다미선교회처럼 된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금도 예수재림과 종말임박,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개신교인이 2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대림절은 기다림이다. 희망을 되새기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을 다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종교인의 바램인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목숨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죽으면 신령한 영체로 바뀌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다. 또 먼저 가신 선배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때 나의 영체를 거둬가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것을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예수님이 오신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내가 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일 뿐이다. 그곳은 시간도 공간도 넘어서는 세계이다.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고 그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내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 개신교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라고 믿는다. 또 지금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은 하나라는 삼위일체을 기독교는 근본 교리로 믿고있다. 위는 셋이지만 체는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위와 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납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와 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신격화시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이 하나님, 예수님과 하나된 것은 381년 이념과 종교, 정치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투표로서 확정된 교리이다.
이 삼위일체에 대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성경의 일부인 것이지, 전부가 아니다. 성령은 거룩한 작용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힘이고 거룩한 기운을 뜻한다. 그 우주적인 기운을 인격화, 신격화한 것이 성령님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대교는 율법, 말씀 등을 인격화 한다. 예를 들어 이레네 성당을 들 수 있다. 이레네는 평화를 뜻한다. 평화를 인격화해서 모신 것이다.”
- 오직 예수·오직 성서를 주장하며 타종교인을 포함,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먼저 원죄에 대해 설명하겠다. 사실 내 큰아버지가 열매 하나 잘 못 따먹었다고 나까지 죄인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된다. 그런데 ‘성삼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이것이 이해가 된다. 예전에는 조상 하나가 잘하면 대대세세가 잘 되고, 조상 하나가 잘못하면 일족이 멸하는 천벌을 받았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은 첫번째 조상인 아담이 잘못해서 우리도 죄인이 되었고, 새 아담이라고 불리는 두번째 조상인 예수가 잘해서 죄가 사해졌다고 믿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이해가 됐을 것이 요즘 시대에 와서는 문화가 바뀌어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죄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에 축적된 죄악이 있다고 본다. 태어날 때부터 혼탁한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는가? 역사적인 죄, 사회적인 죄, 유전적인 죄가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 원죄에 대해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다메섹에서 밝은 빛 속의 예수를 만났다고 전한다. 그것은 예수의 구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의 세계를 밝은 빛으로, 예수 밖에서의 세계를 어둠이라고 표현하는 일종의 명암법을 사용한 것이다.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예수가 너무 좋다보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예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석가, 공자, 무함마드 등도 있다. 다원주의 시대에 옆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많다. 내가 따르는 예수 코스가 좋은데 다른 코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자기 코스밖에 보이지 않으니 이것만 좋다고 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에 옆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단일종교문화권인 서양에서는 괜찮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시각이 더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나온다. 성만찬 예식 등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본 아피오키아 시민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팔자는 곧 내 팔자다 생각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닮는 척은 해도, 예수 같이 살고 있진 못한다. 그런 우리일지라도 하나님은 잘 봐주신다. 그렇기에 예수 코스는 편하다.
그러나 불교 코스는 난코스인 것 같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부처님을 닮기가 쉽지 않다. 대스님들은 ‘자력성불’을 외치지만, 전세계 불자들은 의탁신앙을 갖는다. 일례로 수능 기간 등 100일 기도를 하는 등 기대려고 하는 것을 대스님들은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인류보편적인 사실인 것이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 불교의 이해넓은 면모도 배워야 할 것이다.”
- 지금까지 신앙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
“10년동안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역사비평, 해석학 등을 배우고 한국에 들어오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한국에 참 편협한 것이 많다. 최근 한국 정치에서 법안 하나 가지고 싸우고 있는 걸 보면 참 편협하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가장 편협한 것은 종교인이다.
비교적 나는 하고싶은 얘기를 하고 사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7년 처벌을 받았고, 가톨릭중앙협의회에 나오는 모든 문서에는 내 글이 실리지 않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처벌 내렸다는 것을 나에게 통보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 밖으로도 쉬쉬할 뿐 밝히지를 않는다. 그래서 아직까지 난 가톨릭의 울타리에서 활동할 수 있다. 나가라고 할 때까지 있을 생각이다. 처벌은 받았지만 사실 37년째 참아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나는 참 감사하다. 내가 다른 종교였다면 어땠을까? 불교에도 이정도의 관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라면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것이다. 장로회만 사소한 것으로 나누어져 몇십개의 장로회가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개신교 실태다. 그나마 기독교장로회가 그래도 이해심이 많은 편이다. 기독교감리회와 기독장로회가 개신교에서 가장 포용적이라는 두개 교단이다. 그런데 그 중 하나인 기감이 얼마전 목사를 내쫓는 등의 행태가 있었다.”
- 정 신부가 회장을 맡고있는 다석학회는 다석 유영모 선생을 기리고 연구하는 모임이다. 유영모 선생은 개신교였다. 유영모 선생의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인가?
“서강대에 있을 당시, 성천문화재단 이라는 곳에서 11년동안 기독교 분야의 강좌를 맡았었다. 그 곳 서재에서 처음으로 다석 유영모의 책을 접했다. 앞 몇장을 읽으면서 느낌이 왔다. 쉽게 말해서 전기가 통한 것이다. 그 책을 접한 뒤로 유인물과 20년에 걸친 일기 복사본 등을 읽었다.
유영모 선생은 종로구 연동교회를 7년 다닌 후로는 예배당에 발을 끊었다. 그리곤 홀로 묵상하며 그것을 하루에 하나 꼴로 한시, 산문 등으로 정리했다. 그는 서양물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떤 선입견이 없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또 예수를 보고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가끔 실수는 해도 그것은 ‘제 생각, 제 소리, 제 인생’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소리였다. 나와는 다르게 서양물을 먹지않고, 골똘히 생각하는 그것에 고꾸라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신학적으로 대화하고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주위에 없어서 외로웠다. 답답할 때 천주교에서 한두명, 개신교에서 안병무 등 몇사람과 토론하는 게 다였다. 그렇기 때문에 안병무의 소리에 매료됐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간 대화를 일관되게 강조해 온 정양모 신부는 1964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1964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성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안동교구 청송본당 주임신부, 1976년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연구원, 광주 카톨릭대와 서강대, 성공회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끝까지 하고 싶은 일은 예수공부와 예수모방이며, 더불어 여러 성현들의 슬기를 익히는 것이다. 현재는 유영모 선생을 기리는 다석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종교의 세계』『요한복음이야기』『공관복음서의 비유』『마르코복음이야기』『네 복음서의 대조』『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등 많은 저서와 편역서가 있다.
(歸天)"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노래가 그렇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당이며 지옥이 따로 있겠나?
한편 부활에 대하여, "나의 삶은 내가 직접 경험하는 영역이니 제법 알 수 있지만, 나의 죽음은 타인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사후 내세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는 고백이다. 이와 관련해 정 신부는 프랑스 가톨릭 작가 샤를 폐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육군 중위로 참전해 치명상을 입고 전사하는 와중에 연락병이 내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진솔하게 답했다고 전한다. "매우 궁금하다!" 정 신부는 생전 처음 가보는 천로역정이 더 아름다울지를 생각했다. 예수와 부활과 관련해 정양모 신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빠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와도 인연을 맺고 산다"며,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하여 직제자들이 예수 발현을 보고 처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오히려 예수 유령이 나타난 줄로 여겼다는 것이다.
"예수는 평생 독신이셨으니 몽달귀신이 되기 십상이요, 이스라엘 왕권을 탐낸 국사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처형되셨으니 원귀가 되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 원귀를 보는 줄로 여겼지만, 발현하신 예수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부활신앙 전통이 이었다(마카베오 후서 7,14; 다니엘 12,1-3). 이제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부활을 확신하고 온 지중해에 예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데 투신하여, 한 세기 안에 지중해 곳곳에 예수 부활을 신봉하는 교회가 생겨났다." 정 신부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닮는 사람"이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팔자소관이 같은 운명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니 "예수처럼 경천애인에 헌신하다 보면 밑지는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럽게 종생하기도 하겠지만, 약간은 바보스러운 그 삶이 실은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 믿고 평생을 살아간다.
바울은 종말에 몸(육신)이 부활한다고 보았지만, 이는 유대인 바울이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따온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유대교 묵시문학계에선 종말 내세를 현세의 연장처럼 여긴 데 비해서, 바울은 종말 내세를 현세와는 질적으로 아주 달리 보았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전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도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우리의 몸은 유한한 물질이라 쓸 만큼 쓰면 폐품으로 변하고 결국 소멸한다는 게 정양모 신부의 소신이다. 몸이 부활하는 게 아니라 "이승을 살아가면서 이룩한 우리의 사람됨, 인간성, 인격, 인품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시범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니만큼 "사랑에 젖어야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께로 반갑게 다가갈 수 있지 않겠나" 물으면서 이게 천당이라 한다. 세상에서 늘 비정(非情)을 일삼았다면 자기 스스로 하느님과 예수에게서 물러설 것인데, 이게 곧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겠나 물었다.
▲정 신부는 숨이 다하면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이 정겹게 맞아주실 것이라고 상상하며 안심한다.
정양모 신부는 요즘 아미타 삼존 내영도(14세기, 국보 218, 비단에 채색, 호암미술관 소장)를 눈여겨보면서 삼존의 자애로운 모습에 미소 짓곤 한다며, "내 목에 숨이 다하면 하나님, 예수님, 성모님 삼존이 나를 맞으실 정겨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삼존은 그 이름만 다를 뿐 그 내세관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구상 시인이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쓴 신앙시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한다. "병실 창문으로/오직 보이는 저 하늘,//무한히 높고 넓고 깊은/그 속이나 아니면 그것도 넘어서/그 어딘가에 있을/영원의 동산엘//털벌레처럼 육신의 허물을 벗어놓고/영혼의 나비가 되어 찾아들 양이면/내가 그렇듯 믿고 바라고 기리던/그 님을 뵈옵게 됨은 물론이려니와/내가 그렇듯 그리고 보고지고 하던/어머니, 아버지, 형, 먼저 간 두 아들과 아내/또한 다정했던 벗과 이웃들을 만나서/반기고 기쁨을 나눌 것을 떠올리니//이승을 하직한다는 게/그닥 섭섭하지만은 않구나…"
마지막으로 정양모 신부는 최근에 심취해 있는 다석 유영모의 <다석일지>를 인용하며 "부활은 하나님을 만나서 임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與空配享)"이라고 소개한다.
묵시묵학에서 벗어나야 허구적 내세관 극복할 수 있어
발제를 마치고 나눈 토론에서, 박태식 신부(성공회 신부, 신약학)는 "정양모 신부의 말씀이 부활이란 어휘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부활'이란 어휘 이전의 '영원'에 대한 지평을 열어주셨다"고 평하면서, 부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됨이 알곡처럼 영글어야 하나님께서 추수하신다는 말을 보충설명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정양모 신부는 "영글다는 말은 사랑에 젖는다는 말일 텐데, 요즘은 '연민'이란 말을 더 쓰고 싶다.
정의구현사제단도 불쌍하고, 정의구현사제단을 싫어하는 정진석 추기경도 불쌍하다. 가난한 이들도 불쌍하고, 사생활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대기업 직원들도 불쌍하다. 이러다 도사의 반열에 드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찬수 교수는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누구든 결국엔 받아주시리라 믿는다.
이찬수 교수(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는 정양모 신부가 <살아도 님과 함께 죽어도 님과 함께>라는 책에서 이미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인에게도 비를 내려주시고 악인에게도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자비하신 하나님은 경계를 두지 않고 살아서 비정을 일삼아도, 정을 행해도 다 부활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정 신부는 "예전에 대전신학교에서 강의했던 한 신부가 지옥은 없다고 가르치고 책도 쓴 적이 있었다. 약하디약한 인간이 좀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보내시겠는가? 지옥은 없다. 있더라도 한시적으로 있지 않겠는가, 주장해서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적이 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그 의미가 아니겠는가" 확인하고, 반주(飯酒)를 즐기던 황금찬 시인이 금주령이 내려진 리비아에 초청받아 가서는 "지옥이 따로 있나, 이게 지옥이지"했던 말을 빌려서, 지옥과 극락이 우리 삶 가운데 이미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유춘자 총무(한국여신학자협의회)는 부활을 역사 안에서 바라봐야 한다면서, 민주화 과정에서 죽은 열사들의 사람과 죽음을 부활을 떠올렸다. 유 총무는 "오늘날 현재 교회에서 기적처럼 다가오는 허구적인 부활 말고 다른 부활에 관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정양모 신부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준해서 우리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짝 맞출 수밖에 없다"면서, 신약성서 자체가 말세가 곧 오리라는 묵시문학이 아주 성행할 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에 사는 사람들은 묵시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 역시 역사가 이천 년 넘게 지속할지 몰랐다. 묵시묵학은 지독한 난세문학이다. 난세를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극복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오시든지 해야 극복될 수 있다. 묵시문학은 창조에서 오늘에 이르는 모든 역사에 관한 얘기를 하느님에게서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묵시문학작가들이 이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겠는가. 가까운 미래는 그들도 어느 정도 알았겠지만, 먼 미래 다른 세상의 이야기는 그들 역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묵시문학작가들의 이야기는 공상, 환상, 망상의 이야기이다."
이날 사회를 맡은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교수)는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믿느냐는 질문에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양모 신부님의 말씀대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가 부활에 대한 대답이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정양모 신부는 안동교구 사제로서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수료하고,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신학사)와 리옹가톨릭대학교(신학석사; 교부학)를 수학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신학박사; 신약성서학)을 나와 광주 가톨릭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2001년 정년퇴임 후에 현재 다석학회 회장으로 일한다. 저서로는 <마르코복음서>, <루가복음서>, <이스라엘 성지-어제와 오늘>, <교회탄생이야기>, <위대한여행-사도바울로의 발자취를 따라> 등이 있다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가 여성의 사제 서품 의사를 피력했다가 교회로부터 경고를 받아았 는데, 여성의 사제 서품에 대해 어떤 의견인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시다.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벽을 허물었다고 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사이엔 세가지 차별이 있을수 없다고.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인종 차별은 상당히 극복했다. 다인종 마을에서 보면 주일미사에 오는 분들 골고루 다 있다. 인종 차별이 상당히 극복이 됐다. 230년 전에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올 때 가장 놀라운 것은 양반과 상놈이 동석하더라는 것이었다. 신분차별 없애는 것도 상당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끈질지게 지속되는 게 남녀차별이다. 여성 서품 불가 이유가 예수 12제자 중 여자가 없다는 것
교황 선거권도 없는 80살 이상이 당선된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기동력 떨어지고. 무사안일주의에 떨어지고, 세상에 민감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천주교는 좀처럼 변하지않을 것이란 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불교 집안에 태어났다면 오대산으로 출가했을지도
-왜 사제가 됐는가.
=4대째 천주교 집안이어서 그 분위기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누가 권고한 것도 아닌데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진학할 때 서울 용산 원효로 4가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내가 만약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오대산으로 출가했을지 모른다. 신학적으로는 성소와 섭리이고, 불교식으로는 인연이다.
-도마복음에 관한 신부님에 대한 생각.
=기독교 복음서 4개. 도마복음은 1947년 이집트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농작물이 자랄 수 있는 곳인 나일강변이다. 강물이 닿는 곳까지만 살고, 나머지는 칼로 자르듯이 사막이다. 나일강 중부지대에 나그함마디란 마을이 있다. 평생 밭을 갈던 지역이다. 청동기시대엔 밭을 깊게 갈지 못했다. 좋은 쟁기가 들어와 1947년 더 깊게 밭을 갈다보니 양피지 문서가 가득 든 항아리를 발견하게 됐다.
1,2,3세기 기독교 최대의 적은 영지주의였다. 서기 100년부터 600년 사이 500년간 교부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논문들이 있었다.영지주의는 밀교다, 자기들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는 비밀결사다. 영지주의 문서 중에 국제적 관심을 끄는 게 도마복음서다. 거기엔 예수님의 일화는 없고, 전부 예수님의 말씀이다. 배경 설명은 일체 없다. 예수님의 말씀의 기록은 서기 50년~60년 사이 시리아에서 쓰여졌고, 그것을 마태오와 누가가 베꼈다. 도마복음은 서기 200년경에 쓰여졌을것이다. 영지주의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변질시켰을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부활이나 죽음 이후에 대해선 유구무언
-최근 다석의 제자 박영호 선생의 <잃어버린 예수>라는 책에서 ‘부활이란 육체가 부활한 게 아니고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책에 보면 깨달음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세상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뭔가.
=부활, 죽음 이후에 대해선 유구무언이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열심히 천착하면 상당히 접근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교해서 유사하게 밝혀낼 수 있다. 공간을 넘어서 편재한 세계, 한계를 넘어서서 무한한 세계가 가물가물하게 보일 수 있다. 부활을 빼놓으면 기독교는 쓰러진다.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놈이 내 수석 제자였지만, 이제 결별한다’고 했다. 다석이 격분한 이유는 첫째는 선생님의 고매한 것을 배우러온 반반한 여자를 건드려 정욕을 못 다스렸고,
둘째는 성당 예배당 갈 것 없이 혼자 믿어라고 했는데, 함석헌이 미국 가서 퀘이커 교도가 되어 수입해왔기 때문이었다.
쓸만큼 쓰면 폐품 처리되는 게 세상 만사 .
박영호 선생은 부활을 깨달아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것으로 본 것 같다. 여러분 대부분이 성경에 심취한 분이다. 그러면 영혼 불멸 신앙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불멸은 구약·신약 신앙이 아니고, 그리스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다. 그 신앙에 따르면 육신은 썩고 영혼은 영혼 무궁한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인간 속엔 불멸적 요소- 그게 영혼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 신앙이었다.
영혼이 육신 감옥 속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탈옥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독배를 마시는 모습을 봐라. 저녁에 해가 떨어질 때 죽기로 돼 있었는데도 아침나절부터 여자들이 통곡하니, ‘철학을 모르는 여자들 사이에서 죽을 수 없군!’하며 내보내라고 했다. 저녁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점심 먹고 나서 독배를 대령하라고 했다. 독배를 마시고 침대에 누우면서 제자들이 엉엉 우니 ‘영혼불멸 신앙이 제자들에게 안먹혀 들어갔구나’라며 통탄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특질은 유한성이다. 하느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에게서 불멸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됐는가. 서기 200년 전부터 순교자들이 ‘저렇게 썩어문들어지겠는가. 하느님께서 살리실 것이다’라는 사상이 있었다. 그러나 쓸만큼 쓰면 폐품 처리되는 게 세상 만사 아니냐. 강철로 냉장고 만들어도 수십년 쓰면 그렇게 된다. 내몸도 70여년 써왔다. 결국에 가면 내 몸도 폐품 처리되는 것이다. 이것을 되살려야 될 건덕지가 어디 있느냐.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영감 시절 있는데 부활하면 어느 시절로 되살리는가. 장애인들은 다시 장애인으로 재생되는 것인가. 인간 세포는 4년마다 99%가 아니고 100%가 바뀐다고 한다. 어느 세포를 거두어서 조립할 것인가. 사업도 너무 복잡한 사업이다.
육체로 살다가 영체로 변하는 것 영원 불멸 ,육신 부활 다 마음에 안 든다.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고 계시던 분이다. 육체를 다해 하느님이 거두어가실 때 이승을 살면서 사람됨, 인간성을 거둬간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영체로 재생이 되는 것이다. 내경우도 육체로 살다가 영체로 변하는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처럼 변해 하느님 동산을 나는 것이다. ‘내가 잘못 살아서 이 꼴로 어떻게 하느님께 다가가는가’라는 게 심판이고 연옥이다.
해석학적 성찰을 하면 그렇게 된다. 최근엔 미국에서 임종환자들만 돌봐온 스위스 여의사 퀴블러스의 책이 널리 읽히고 있다. 미국의 환자들 가운데도 의학적으로는 죽었다고 판정 내렸는데 몇시간 후에 소생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숨이 넘어갈 때부터는 새까맣더냐’, ‘어떻더’냐’고 물었다. 그러면 예외없이 저승 체험이 있다. 보통은 친구 가운데 가까운 사람,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놀랍게도 수호천사가 마중 나오더라. 정교회 신도들과 가톨릭 신자들에겐 성모 마리아가 나오기도 한다. 퀼블러 노스가 임종환자들 병상일지를 보면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례 5천건을 분석해봤는데, 개신교 신자들에겐 성모님이 마중 나온 사례가 한 건이 없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괜히 성모 마리아를 욕하는데, 아마도 성모님이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4대 성인에 대한 우상화는 문제 아닌가.
=하느님도 비밀스럽고 신비라고 하잖은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정해졌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얼마나 높았으면 그랬겠는가. 불교 경우에도 석가모니도 인간이지만 부처로, 화신불로 추대하는 것은 존경심과 사랑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중국 곡부에 가보면 공자님의 묘비는 초라하지만 대성(대성인), 지성(지극히 거룩한 분), 문화를 선양한 임금님이라고 칭송해 놓았다. 하느님, 진여, 공의 세계를 알려준 어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동서를 막론하고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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