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시

누군가 그리울때는 가을 시를 읽자

들녁나그네 2008. 11. 12. 16:48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기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랄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들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모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비가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 '푸르른 날' 모두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사랑에 찢어진

내 마음을

쓰리게 하네.

 

종소리

울려 오면

안타까이 가슴만  막혀

가버린 날을

추억하며

눈물에 젖네.

 

낙엽 아닌 몸이련만

오가는 바람따라

여기 저기 불려다니는

이 몸도 서러운  신세.

 

-폴 베르레느, '가을의 노래' 모두'

 

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 '낙엽' 모두 

 

.      출처 : 누군가 몹시 그리울 땐 가을시를 읊자 - 오마이뉴스